FOSDEM 2026 후기 (-‎-verbose)

우리의 일상이 셀 수 없이 많은 기술로 둘러싸여 있다는 말은 이젠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이른 아침 깊은 잠에서 깨어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어떤 기술로 만들어진 공간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기술을 입고 먹고 마시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먼 직장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나만의 기술을 발휘하여 작게나마 무언가를 소비하거나 생산하죠. 늦은 밤, 골목을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내가 정말 스스로 걸음을 걷고 있는 걸까? 지루한 비유를 사용하게 되지만, 스스로의 처지가 기술의 앙상블에 이끌려 엉성한 춤을 추는 꼭두각시 인형 같다는 생각에 문득 서글퍼집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기술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문득' 느끼게 되는 순간과,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 전까지의 고요한 시간이 있다는 점에 조금 더 주목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눈을 깜빡이거나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내 신체의 일부처럼 너무나도 익숙하게 다양한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엔진이 고열을 내뿜으며 수 톤의 고철을 하늘로 밀어 올리는 그 순간조차, 우리는 단지 탑승객으로서 흘려보내야 할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으로 남을 뿐이니까요. 그렇게 FOSDEM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무거운 두 눈을 몇 차례 감았다 뜨니, 어느새 서울로부터 대략 8,000km 떨어진 브뤼셀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FOSDEM 컨퍼런스로 가는 트램은 붐볐습니다. ULB 캠퍼스의 정문에는 후드와 백팩을 맨 (혹은 펭귄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컨퍼런스로 향합니다. 함께 온 동료들과 함께 긴 줄을 기다려 FOSDEM 공식 굿즈를 구매하고, 듣고 싶었던 세션을 들으러 부스 앞에 모여든 고밀도의 인파를 헤쳐가며 세션룸으로 나아갑니다. 익숙하지 않은 길 위에서 지도 한 장에 의존하여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다가 가까스로 세션에 참석합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자리에 착석하여 가방을 열고 물을 마시려 하였지만, 비어버린 물병을 보며 물을 조금 더 떠왔어야 했다는 약간의 후회를 합니다. 이런... 게다가 아쉽게도 이번 세션에서는 생각보다 얻어가는 내용이 많이 없네요.

서로 다른 건물의 수많은 세션룸을 숨 가쁘게 오르내리고, 점심을 먹기 위해 한 시간 넘게 푸드트럭 앞에서 줄을 서다가, 또다시 부스 앞을 빼곡히 메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토요일에 듣고 싶었던 마지막 세션이 끝나고, 훈훈한 열기로 가득 찬 강의실을 빠져나와 창가 앞에 섭니다. 뜨거운 증기가 가득 찬 듯한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하고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부스가 모여 있던 1층과 2층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텅 빈 계단실을 따라 울려 퍼져, 다음 세션을 듣기 위해 높은 계단을 올라와 문 앞에 선 사람들의 가파른 낮은 숨소리와 나란히 섞입니다.

열기가 고요하게 식어가는 복도를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부스와 세션을 만들고, 기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만약 기술이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았다면 (혹은 드러낼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처럼 부스에 참여하거나 세션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술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형태로 주어져, 우리는 기술을 알지 못한 채 사용하거나, 혹은 기술에 의해 사용당하게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약간 으스스한 상상을 해보죠. 우리는 두 손과 두 발을 자유롭게 사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두 손과 두 발이 스스로 움직이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요?

기술의 자연성이 반드시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드러날 수 없는 것이었다면, 혹은 기술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FOSDEM과 같은 컨퍼런스는 개최될 수 없었을 것이고, 우리는 기술에 매혹될 수는 있어도 기술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네트워크 기술이 세계에 드러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구성하는 정교한 구조의 아름다움에 감동할 수도 있고, 동시에 네트워크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며 압도당할 수도 있겠죠. 세션이 끝나고 텅 빈 복도를 지나며, 문득 FOSDEM은 거대한 제단과도 같았던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세션을 진행하는 발표자는 기술의 한 색채를 묘사하는 사도가 되고, 참가자들은 기술에 다가가고자 하는 신도가 되어, 어둠 속에서 잠자던 기술을 세계로 불러들이는 밀의의 열기로 가득 찬 순간이었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행사의 열기가 가라앉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일요일 저녁, 운이 좋게도 함께 온 동료들과 함께 FOSDEM 자원봉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대빵(?) 자원봉사자의 지휘에 따라 복도의 먼지를 쓸고 빈 맥주병을 줍고 쓰레기를 바깥으로 나릅니다. 각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행사가 끝난 빌딩의 구석구석을 정리해 나갑니다. 자원봉사를 마친 후 COSCUP에서 주최하는 Asia Tech Community Meet Up 저녁 식사 모임에 참석합니다. 정말로 호화로운 식사를 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며 다양한 언어로 건배를 외칩니다. 하늘에서 찬비가 내리고, 몇몇 사람들이 남아 맥주 한 잔을 더 마십니다. 호텔로 돌아가며 어둠에 뒤덮인 브뤼셀의 유명한 관광지들을 짧게 둘러봅니다. 높은 지대로 오르니 캄캄한 비구름 아래 브뤼셀 시내의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오릅니다. 그렇게 문득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찾은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수천 명의 인파가 공동의 관심사로 FOSDEM에 모여 강연을 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각자의 관심사에 맞는 부스에 찾아가 즐겁게 서로의 경험을 공유합니다. 세션룸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짧은 대화를 건네고, 가판대에서 음료를 사면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자원봉사를 마치고 FOSDEM을 떠나며 자원봉사자와 스태프에게 일 년 뒤에 다시 보자는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즐겁게 듣고 웃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브뤼셀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야경을 바라보며, 브뤼셀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합니다. 기술이 우리의 일상에서 드러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 또한 그 모습을 감추고 우리의 주변을 조용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연결되어 있다는 거대한 흐름 ... 이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컨퍼런스로부터 드러낼 수 있었던 다른 하나의 중요한 요소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사람들은, 이어져 있는거야."

  • Serial Experiments Lain, Episode 2

그곳이 Wired가 아니더라도, 장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4개의 좋아요